
一魚濁水 w.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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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탁수(一魚濁水 : 물고기 한 마리가 큰물을 흐리게 한다)
※ 처용설화를 일부 차용하였습니다.
이기영은 오늘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폭포처럼 흘러내릴 것 같은 별들의 강을 밤하늘보다 새까만 눈동자가 물고기처럼 유유히 헤엄친다. 찬 밤바람에 몸이 식어가는 것도 모르고 자색포가 덮은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끊임없이 흐르는 강의 방향이 한쪽으로 정해져있음을 알아도 이기영은 조그만 변화조차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태평성대의 지루함에서 비롯된 것인지, 물 밑에서 칼을 가는 아귀들의 쓸모를 가늠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흐르는 강처럼 끊임없이 생각한다.
내일 왕은 여행을 간다. 평화가 찌운 살을 한 점이라도 더 뜯어먹기 위해 갈아세운 지방 호족들의 이가 자신을 향하지는 않는지. 그 불안이 왕을 부지런히 만들었다. 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그래서 이기영은 오늘도 별들을 살폈다. 저 수다쟁이들은 가끔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주곤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번 여행에서 일어날 일 같은 건 없었다. 왕의 눈에 띌까 호족들도 이를 감추고 웃으리라. 패기도 없는 것들. 물론 그런 것들이 나타난다면 이기영은 지금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그 이를 하나씩 뽑아 줄 테지만. 지루했다. 무엇보다 그의 자리는 평화로울수록 위태로웠다. 지금은 평화도 그의 손으로 가져온 것임을 왕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하거나, 정치적 조언을 주는 정도로 간신히 발을 붙이고는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고요할수록 돌을 던져 흔들기 쉬운 법이다. 지금쯤 뭔가 터지는 게 좋은데.
이기영은 추위에 몸을 떨다 안으로 들어와 화로에 불을 지폈다. 실내를 은은하게 밝혀가는 주홍빛을 보고 있노라면 그 불에 바람을 불어주고 싶기도 하다. 이기영의 몸을 데우는 열기가 실내에 가득 차도록. 기왕이면 큰 불씨가 있으면 좋겠다.
바다라. 힘들지만 않으면 좋은데. 동해안은 가까우니 그래도 위쪽으로 올라가는 길보다는 편하겠지. 글을 읽고 하늘이나 보는 그의 체력으로 긴 여행을 견디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아이마냥 묻길 좋아하는 부지런한 왕이 그를 놔두고 갈 리도 없고. 변명을 내밀며 따라가지 않는다고 해도 이기영은 결국 왕의 여행길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
적당히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그 지방의 호족이 준비해준 자리에서 술상을 펼치며 기분 좋게 놀던 차였다. 술도 오르고 왕에게 한번 비벼보려는 지방 호족이 왕의 옆에 철썩 붙어있기에 산책이라도 할 겸 바다의 경계선을 따라 쭉 걸었다.
이기영은 하늘거리는 푸른 포를 걸친 사내를 마주했다. 얇게 발목을 치고 가는 파도에 발이 젖는 줄도 모르고 선 사내는 멍하니 뭍에 늘어선 기와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이라도 나간 모양새였으나, 이기영은 사내가 인간이 아님을 알았다. 그는 미약하나마 주술과 그 이론에 조금 밝기도 했고, 별을 보느라 눈이 좋은 탓도 있었다. 그리고 명백하게 이질적인 푸른 눈동자가 의심에 확신을 주었다. 바다 건너서 왔다는 이방인이 저런 눈을 가진 걸 보긴 했다만. 이기영의 확신은 틀린 법이 없다.
그렇다면 그냥 지나갈 것인가? 그럴 리가. 이기영이 이런 하늘이 내려준 기회를 놓치다니. 내일 당장 나자빠져 죽는다고 해도 그럴 일은 없었다.
“게서 뭐 하십니까. 발이 젖지 않습니까.”
“아.”
사내는 키도 매우 컸다. 왕의 병사들 중에도 저런 덩치는 흔치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의 젖은 발과 옷자락을 보고 당황하여 허둥지둥 하는 모양새가 아이와 닮았다. 그 바람에 튀어 오른 물 때문에 결국 옷이 더 젖고 말았다. 이기영은 인간이 아닌 사내에게 왕에게나 짓는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부드럽게 손짓했다.
“이리 오십시오.”
이기영의 부름에도 사내는 큰 눈을 굴리며 발걸음을 뗄 듯 말 듯 떼지 않고 제자리에 서있었다. 이기영은 속으로는 혀를 차면서도 품을 뒤져 손을 닦을 때나 쓰는 천 조각을 찾아 쥐었다.
“이걸로 닦은 후에 길을 좀 걷다보면 오늘은 날이 좋으니 금방 마를 것입니다.”
사내는 천조각과 이기영의 얼굴을 몇 번이나 번갈아보았다.
“그리 경계할 거 없지 않습니까. 어려운 이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일 뿐이니. 천 값은 당신 얼굴을 뵌 걸로 대신하면 됩니다.”
경계를 풀기 위해 농 삼아 던진 말이었지만 사내의 얼굴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왕의 옆에서 뛰어나다는 용모는 남녀노소 다 보며 다녔으나, 사내의 앞에서면 빛을 잃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왕도 믿는 이기영의 말을 믿지 못하겠는지 사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이게 그만한 금전이 됩니까.”
물론 인간이 아닌 것과 연을 나눌만한 귀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접근하긴 했지만 이기영은 문득 이 사내의 뒷일이 걱정되었다. 이대로 보냈다간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사고 '이걸로 살 수 없겠습니까?'하고 물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게 통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게…….
“당연히 그건 농이지만, 사람은 좋은 외모에 호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건 호의도 담고 있습니다. 자, 어서 받아 가십시오.”
이기영은 흰 천 조각을 흔들었다. 사내는 또 머뭇거리다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에 긴 포 자락이 파도처럼 너울거렸다. 꽤 먼 거리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이기영의 앞에 성큼 선 사내는 몸도 좋았다. 품이 넓은 포 때문에 몰랐는데 넓은 어깨나 가슴이 무인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바람이 불자 바다 냄새가 났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진득한 소금 내가 아니라, 청량하고 시원한 향. 사내에게서 나는 걸 알고 이기영은 아, 이거 제법 대물이구나 싶었다. 이기영은 이런 일을 미리 얘기해주지 않은 별들에게 심통이 났다. 허참, 우리 사이에 너무 한 거 아닙니까. 별들이 들으면 비난이 쏟아질 불평이었다. 이기영은 웃으며 다시 한 번 천 조각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선의이니 담아둘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호의는 담아 둬야합니다. 이기영은 속으로 자신이 사내에게 건넨 호의를 셈했다. 사내는 천 조각을 받아 허리를 굽혀 젖은 발을 닦았다. 이기영은 그가 발을 다 닦기를 기다리다 허리를 세우자 이것도 옷자락이 마를 때까지만 함께 걷자고 했다. 마침 산책 도중이었다고 말하니 사내가 이번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받는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었다.
“무슨 일로 거기 계셨습니까.”
대답이 들려올지는 기대하지 않고 이기영이 물었다.
“뭍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기영은 순간 머리를 짚을 뻔 했다. 아주 그냥 인간이 아닌 걸 숨길 생각이 없나보다. 처음 만난 사람이 이기영인 걸 사내는 다행으로 알아야했다. 아니었다면 어디 제사에라도 끌려갔거나, 관으로 끌려가 옥에 갇혔으리라.
“그런데 왜 서 계시기만 했습니까.”
“겁이 나서요.”
“그럼 돌아가시지 그러셨습니까.”
“제가 가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음. 이기영은 머리를 굴렸다. 이만한 대물이 가야만하는 일이라니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번에도 별들을 욕했다. 이렇게 큰일을 안 가르쳐 줘? 서운하고 억울한 일이다.
“제가 뭍에 대한 건 잘 모릅니다. 그래서 도와줄 이를 찾아야했습니다.”
“귀한 분께서 오셔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면 유능한 이를 찾아야겠습니다.”
이기영은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 속으로는 나야, 나! 하고 외쳤지만 말이다. 왕을 등에 업고 인간이 아닌 존재를 부릴 수 있는 기회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기영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내가 다 가르쳐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사내가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이상 적어도 손을 뗄 여지는 만들어 둬야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도록. 그래야 원망이 없지 않겠나. 뭔지도 모르는 존재의 원망어린 저주를 받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당신은 아는 것이 많아 보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를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이기영은 이 사내를 보낸 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참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보물이 굴러다니는데 줍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라면.”
*****
이기영은 연회 장소로 돌아왔다. 왕과 그 일행들은 거나하게 분위기에 취해있었다. 이기영은 분위기를 망치지 않게 은밀히 그 속으로 끼어들었다.
이기영과 왕의 일행은 뜻밖의 일을 맞이했다. 조금 전만 해도 파란 하늘에 진청색의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져있었는데, 스산하고 찬 기운이 불쑥 올라오기에 주변을 돌아보니 어느새 하얀 안개가 땅을 기며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었던 하늘은 시커먼 먹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술잔을 잡은 손을 파르르 떨던 이기영은 왕이 보기 전에 손을 잡아 멈췄다.
늘 걱정이 많은 왕은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이기영을 불러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이기영은 태연하게 웃으며 늘 그의 왕을 다독이던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것은 용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
왕은 그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길조인지, 흉조인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따지는 중일 테지. 왕은 곧 현명한 답을 찾았는지 옆에서 눈치를 보는 신하를 불러 명했다.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제단을 짓도록 하라.”
왕의 명령의 떨어지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사라졌다. 먹구름이 흩어지는 자리에 빛이 쏟아지는 광경이 장관이었다. 신하들은 그 모습을 보며 왕에게 아부하기 바빴다. 그 행렬에 빠질 이기영이 아니었다. 역시 현명한 우리의 왕이십니다. 이기영은 사실 왕이 어떠한 대답을 하더라도 구름이 물러날 것이라는 걸 알았으나, 깊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북과 피리소리가 귀를 간질이며 들려왔다. 예로부터 신비한 일이라고 하면 음이 빠질 수는 없지. 먼 바다너머 구름이 걷혀가는 하늘로 용이 날아올랐다. 신하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인생과 역사에 길이 남은 광경이었다. 탄성이 경악으로 바뀌기 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하늘로 날아오르던 용이 긴 몸을 꼬며 그들이 선 곳으로 빠르게 날아왔다. 좀 천천히 오는 게 멋있는데. 이기영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신하들 사이에서는 큰 소란이 일었다. 무인들은 검파를 잡으며 왕의 곁을 둘러쌌다. 위험이 없는 걸 알지만 이기영도 냉큼 무인의 등 뒤로 숨었다.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빛을 독식한 푸른 비늘이 한여름의 햇볕아래 빛나는 바다처럼 반짝였다. 그 신성한 광경에 놀라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용이 떨어져 내렸다. 정확히는 좀 더 앞, 깎아지른 검은 암벽이 있는 절벽 끝으로. 비늘이 빛으로 화해 산산이 흩어지고 그 끝에 남은 것은 사뿐히 발을 내딛는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푸른 포가 바람에 휘날리고, 바다처럼 깊은 푸른 눈이 일행을 향했다.
누군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저는 용왕의 아들입니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으니 저를 데려가주십시오.”
가르쳐준 대사는 어디다 까먹고 빌어먹게 솔직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이기영은 왕에게 다가가 귀에 속삭였다. 왕의 덕에 용왕의 아드님께서 깊이 감읍하여 스스로를 왕과 나라를 위해 일할 신하로 받아 달라 하십니다. 부디 덕을 한 번 더 베푸시지요.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낯선 사내에게 물었다.
“그대는 이름이 무엇이오.”
“김현성입니다.”
*****
수도로 온 김현성은 결국 이기영의 몫이 되었다. 이기영은 하루가 멀다 하고 궁에 드나들었다. 김현성에게 궁의 일과 세속 사를 가르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기영이 의도한 바대로 나쁘지 않은 불씨가 타오른 게 그 이유였다. 왕은 매일 이기영에게 용의 아들에 대한 보고를 듣고 싶어 했고, 신하들은 그것이 무슨 파장을 일으킬지 말을 나누고 머리를 굴리기 바빴으며, 그것은 불씨를 키울 바람이 될 징조를 보였다. 덕분에 이기영은 늘 기분이 좋았다. 궁 안으로 닥칠 한바탕의 파란이 그의 자리를 공고히 해주리라.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현성 씨가 뭐든 잘 배우시니 그렇습니다. 회의에서도 주장이 강하시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 쪽은 아직 어렵습니다.”
이기영와 김현성은 직책과 출신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그들의 관계 자체가 독특해서 하나하나 따지자면 복잡하기만 했다. 용왕의 아들인 것과 이기영의 전적인 지원으로 김현성의 직책은 날로 높아져갔다. 날이 세운 신하들과 그것에 대한 왕의 불안이 김현성에 대한 신임으로 이어진 탓이다. 김현성은 어느새 비색 관복을 입었다. 푸른색이 더 어울리는데. 이기영은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아무런 문양도 장식도 없는 푸른 포를 떠올렸다. 김현성에게 쓸데없이 화려한 옷은 어울리지 않는다. 관복만 아니면 갈아입으라고 했을 텐데.
이기영은 읽고 있던 서책을 내려놓고, 쌓아뒀던 서책 중에 두 권을 빼내어 김현성에게 건네며 내내 묻고 싶었던 일을 가볍게 물었다.
“그런데, 밤마다 어디를 그리 가십니까. 혹시 그게 해야만 하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까?”
“네. 찾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뭍을 겁내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김현성은 이기영이 가르쳐주는 것을 아가미삼아 물을 만난 물고기 마냥 밖을 쏘다녔다. 주술로 그 행적을 캐보려고 해도 이기영의 미약한 주술로는 용의 신기를 당해낼 수 없는 모양인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렇게 간이라도 내줄 것 마냥 도와줬으면 무슨 일 인지, 어딜 가는 지 정도는 이야기 해줘야하는 것 아닌가? 이기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현성은 뻔뻔스럽게도 입을 닫았다.
그러나 이기영이라고 지켜만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엇을 찾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기영 씨는 이미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저를 못 믿으시는군요.”
“아닙니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날 기영 씨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영 씨의 큰 호의에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뭘요, 다 받아낼 겁니다. 하지만 그날 이기영을 만난 게 김현성의 행운임은 틀림없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 예쁜 비늘까지 탈탈 털려 바다로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이정도 밀어붙였으면 말할 법도 한데, 김현성은 또 입을 다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매일 별을 보아도 별다른 징조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기영은 한숨을 쉬는 대신 부드럽게 웃으며 책 두 권을 든 채 시무룩해진 김현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힘이 되고 싶었을 뿐입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저는 현성 씨에게 매우 큰 호의를 가지고 있답니다, 라는 미소를 지어보이자 김현성의 얼굴이 서서히 환해졌다. 급하게 하려고 하면 체하는 법이다. 말을 못하겠다면 말하게 만들면 되는 법. 과연 어떤 방법이 잘 먹혀들지가 해결 과제였다.
“네. 감사합니다.”
한결 편안해진 김현성의 목소리에 만족하고 막 책을 펼치려는 때였다.
“형님!”
문이 벌컥 열리며 큰 목소리가 실내를 뒤흔들었다. 이기영이 일하는 관저에 그를 '형님'이라 부르며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덕구야.”
“들었소? 대륙에서 온 사자를 초대해 궁 연못에서 연회를 연다는데 거, 가서 연꽃 구경이나 합시다. 이런 날에 무슨 책이요.”
“일하고 있는 거다. 대륙에서 온 사자?”
“거 왜, 전에 한번 왔지 않소. 족제비같이 생겨서 치근대던 그 놈 말이요.”
“무서운 말 말아라. 그냥 점괘나 봐달라고 한 거야.”
이기영은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아는 얼굴을 끄집어냈다. 왕과 한나라를 위해 일하는 이기영을 무슨 저잣거리 상인에게 점괘나 봐달라는 듯이 얘기하던 놈. 그것도 이번에 들일 첩에 대한 점을 봐 달라던 얘기였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미쳤냐는 말을 돌려 하며 거절했을 것을. 왕족의 친척이라는 말에 조그만 성의를 베풀어줬다. 당연하지만 진짜 점은 아니었다. 미쳤다고 진짜 점을 봐주겠는가? 그냥 듣고 싶어 하는 말이나 늘어놔줬더니 크게 감격하며 돌아갔다.
“그럼 한번 가봐야겠네.”
“그놈은 별로 맘에 안 들지만 요즘 형님 너무 일만 하지 않소. 연못에서 연꽃도 보고! 노래도 듣고! 시도 읊고!”
이기영은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충격이었다. 어떻게 내가 이걸 모를 수 있지? 김현성만 없었다면 박덕구가 부르러 오지 않아도 먼저 그 자리에 앉아 있었을 텐데. 김현성을 챙기느라 주위에 너무 느슨했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박덕구의 제안에 못이기는 척 이기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책 두 권을 든 채 눈을 깜빡이는 김현성이었다.
“현성씨도 가십니까?”
“네. 저는 가면 안 되는 자리입니까?”
평범한 관원이라면 안 되지. 하지만 김현성에 대한 왕의 신뢰와 용왕의 아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며 쫓겨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런 자리는 질색하며 피하는 김현성이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는데 어찌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을 살피려했으나 이기영을 보는 얼굴은 용보다는 강아지 같은 모양새여서 괜찮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궁의 연못은 대대로 왕의 자랑이었다. 연못을 둘러싼 정원에서 사계에 맞춘 꽃과 나무가 피고 지며 5개의 누각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다양한 색의 연꽃이 연못을 채울 때 누각에서 그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름다웠다. 잔잔한 수면이 푸른 하늘을 거울처럼 비추어 마치 하늘에 꽃이 핀 듯 했다.
이기영과 일행이 도착하니 연회는 벌써 한창이었다. 금을 뜯는 소리가 들리고, 웃음소리가 길게 오갔다.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그 안에서 오가는 말과는 다르게 맑게 울렸다.
“하하, 귀한 분이 오셨소.”
붉은 얼굴의 사자가 이기영을 발견하고 반갑게 말했다. 사자의 말에 술잔을 부딪치던 대신들의 시선이 이기영과 김현성에게 몰렸다. 박덕구는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비워두었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옆자리의 안기모가 그를 반갑게 맞았다.
“소인보다 더 귀한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소인이 퍽 늦었나봅니다. 부디 내쫓지는 마시지요.”
“내쫓다니.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시오. 자자, 이쪽에 앉아서 재밌는 얘기나 들려주시오. 돌아가서도 천문박사의 입담이 많이 그리웠소.”
이기영은 사자의 옆자리에 준비된 상을 바라보았다. 빈상이 하나뿐이다. 김현성이 올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 나라도 여기 있다가 김현성이 나타나면 눈을 한번 닦아봤을 터였다. 눈치 있는 누군가가 준비를 위해 재빨리 자리를 뜨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게 올 때까지 김현성을 세워 둘 수도 없다.
이기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김현성이 뒤를 바짝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혹시 굳어있으면 어쩌나했는데 다행한 일이다. 사자의 눈길이 이기영에게 붙잡혀 있을 때 얼른 입을 열어야했다.
“오늘은 사자께 소개해드릴 이가 있습니다.”
이기영이 운을 떼자 사자의 눈이 자연스럽게 등 뒤로 넘어갔다. 없는 게 없다는 대륙에서 온 사자도 이 어디에 있어도 눈길을 사로잡는 존재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나보다.
“혹시 이분이 바로 수도 안에 모르는 이가 없다는 용왕의 아들이오?”
“그렇습니다. 놀라지 않으시는 걸 보니 이야기는 다 들으신듯합니다.”
사자의 눈이 호기심을 담고 김현성을 훑어보았다. 비색 옷도 빛을 바래는 얼굴을 본 사자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기영은 가만히 선 김현성의 옷자락을 잡아끌어 빈 상 앞에 앉히곤 사자와 김현성 사이에 털썩 앉았다. 어색함이 없도록 사자의 상에 놓인 술병을 잡고는 빈 잔을 채우는 것까지 누구도 뭐라 입을 떼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내 오자마자 들은 이야기가 바로 그거였소. 지금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있던 참이오.”
“제가 선수를 빼앗긴 모양입니다. 이거, 여기에도 제가 처음 보는 이가 계십니다. 누구십니까? 이분도 용왕의 아드님이십니까?”
“무슨 용왕의 아드님을 길에서 주운 것 마냥 말하시오. 이는 천문박사처럼 아는 것이 많아 이번에 동행하게 되었소. 황제폐하께서도 기대가 많으시지.”
바다에서 줍긴 했지. 생각으로 답변한 이기영은 사자의 옆에 앉은 이를 보았다. 전체적으로 하얀 백의에 검은 띠를 두르고, 금색 자수를 놓았다. 빽빽하게 놓인 자수가 단아한 하얀색을 화려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느긋한 인상과 뻗쳐있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이질적이다. 실제로 이기영의 눈에도 앉은 이가 보통 인간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범상치 않은 분이십니다.”
“진청입니다. 사자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바둑도 잘 두신다고요. 떠나기 전에 시간이 되시면 바둑을 꼭 한번 함께 두고 싶습니다.”
“하하. 이가 바둑을 좋아한다기에 내가 입이 닳도록 이야기했소. 둘의 승부를 나도 꼭 보고 싶소.”
심심하다기에 접대도 할 겸 아슬아슬하게 져준 바둑이 퍽이나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이기영은 웃으면서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기영도 바둑 두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진청이라는 이는 아무리 봐도 이기영이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럼 한번 시간을 내보겠습니다.”
라고 말했지만 시간은 그가 떠나는 날까지 나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은 궁에 붙어있지 못할 정도로 바쁠 예정이니까. 핑계는 많았다.
“기대하겠습니다.”
세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분위기에 취해 주섬주섬 꺼낸 이야기가 오갔다. 옛 역사와 정치 이야기, 자리에 없는 대신에 대한 뒷담이나 관심도 없는 가정 사까지. 그동안 이기영의 상도 준비되어 앞에 놓였다. 사자는 기분이 좋은지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진청이라는 자는 학문 이야기만 나오면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서적까지 끌어다 늘어놓아서 이기영은 이제 그만 자리를 뜨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다지 깊지 않은 독의 밑바닥이 보여 박박 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들어본 적 없는 책이지만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보고 싶습니다.”
이제 그만해! 하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온 이기영을 구해준 것은 뜻밖에도 사자였다.
“천문박사도 여기보단 넓은 대륙으로 가 공부하는 건 어떻소. 유학 말이요. 내가 아는 선생들도 많으니 소개 해줄 수도 있는데.”
“사자의 말씀은 감사하나 소인에겐 과분합니다.”
이기영의 말은 진심이었다. 유학을 다녀오면 지금처럼 높은 대신들에게 눈총을 받을 일이 없기는 하겠지만, 이 자리가 그때까지 남아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왕의 목숨조차 훅 꺼질지 모르는 등불과 같은 것을. 거기다 이기영에겐 이정도 물이 딱 맞았다. 불안하긴 하나 왕은 이기영의 손 안에 있었고, 마침 사치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평화롭다. 괜히 대륙에 가서 진청 같은 이를 상대하기도 껄끄럽고.
“내 진지하게 하는 말이니 한번 생각해보시오. 천문박사라면 황제폐하도 환영하실 거요.”
사자는 또 이기영에게 술을 건넸다. 이기영은 웃으며 술을 받았다. 그러면서 그럼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라고 무난한 대답을 꺼내놓았다. 이정도 해두지 않으면 계속 물고 늘어질 낌새가 보였기 때문이다.
막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쨍,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나른하게 취한 누각을 갈라놓았다. 수많은 시선이 한 번에 이기영의 옆자리로 몰렸다. 김현성의 손에 비해 유독 작아 보이는 술잔의 바스러진 조각이 술상 위로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사과 치고는 목소리에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왜 저러지? 의문을 들었으나 이기영은 그냥 연회에 익숙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깊은 생각보다는 빠른 수습이 필요한 때였다.
“사자, 내일은 동쪽에서 혜성이 나타날 테니 꼭 보십시오.”
"“정말이오? 허, 천문박사는 그런 것까지 예측할 수 있단 말이오?”
이기영이 꺼낸 말에 표정을 굳히고 있던 사자의 안색이 금세 환해졌다. 이기영이 들고 있던 술을 내려놓으며 끄덕였다.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진청님.”
이기영은 괜히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진청에게 화살을 돌렸다. 진청은 눈을 내리깔며 술을 마시다 가지런한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 말이 헛소리라고도, 그렇다고 진실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기영은 가슴에 맺혔던 덩어리가 쑥 내려가는 걸 느끼며 눈을 휘어 웃었다.
“하늘의 뜻을 인간이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다만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잘도 빠져나가기는. 이기영은 사자의 주의를 돌린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연회가 끝이 났다. 거나하게 취한 사자는 일행의 부축을 받으며 거처로 향했다. 뒤를 따르던 진청은 그 많은 술을 마시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헤어질 때 이기영의 귓속에 한마디만을 남겼다.
“큰 역병의 징조를 왜 모르는 체 하는가 했더니 그냥 사기꾼이었군.”
“하늘의 뜻을 인간이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
자색 눈이 그를 경멸하듯이 노려보고 떠나가는 것을 이기영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껄끄럽다. 저런 놈이 있는 줄 알았으면 그냥 참석하지 않았을 것을. 사자 일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있던 이기영이 몸을 돌렸다. 조금 먼 거리에 김현성이 서 있었다. 길을 밝히는 등불에 비치는 얼굴에 불안과 슬픔이 가득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이기영까지 괜히 불안해졌다. 대체 무슨 일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다. 숨길 줄 모른다고, 읽기 쉽다고 단정했던 김현성에 대한 생각이 길을 잃어버렸다. 이기영이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김현성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
그날 밤 김현성은 또 어딘가로 사라져 다음 날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이기영의 말대로 동쪽하늘에서 혜성이 떨어졌다. 긴 꼬리를 남긴 빛이 순식간에 떨어지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
김현성이 돌아온 것은 혜성이 떨어진 다음 날 밤이었다. 며칠 밤을 새도, 어떤 험한 일에도 빛을 잃지 않던 얼굴이 눈에 띄게 초췌했다.
“기영 씨.”
물속에서 잠긴 듯 음울한 목소리에 이기영은 눈을 떼었던 천반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듯 무심을 가장하고 말했다.
“늦은 밤에 무슨 일이십니까.”
3일간 이기영은 그날 있었던 일을 곰곰이 되짚어보며 김현성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생각해봤다. 가장 가능성 있는 추측은 일을 도와주기로 했던 이기영이 대륙으로 유학을 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당황했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것. 어찌 보면 곤란한 오해였으나, 이기영은 이를 이용해보기로 했다. 잘만하면 그가 무엇을 찾는지 실토하게 할 수 있으리라. 3일 동안 얼굴 한 번 못 볼 정도면 믿어볼만 하다.
“잠시 이야기 좀 하고 싶습니다.”
“제가 아직 일하는 중이긴 합니다만. 잠시라면 괜찮겠죠. 마침 차가 마시고 싶던 참입니다. 이쪽에 앉으십시오.”
이기영은 그의 일을 돕는 관원이 앉곤 하는 옆자리를 권하고 차를 준비했다. 김현성은 이기영이 건네주는 찻잔을 들고 말이 없었다. 그 얼굴이 처음 바닷가에서 만났던 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겁이 날 정도인가. 이기영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일의 진행이 꽉 막혔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기영은 김현성이 입을 떼기만을 기다렸다.
“정말로 가시는 겁니까.”
“어디를 말입니까?”
“…대륙으로.”
“아직 생각 중에 있습니다. 대륙에서 많은 걸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사자께서 좋은 선생도 구해주신다고 하시니. 이런 기회가 흔치는 않지요.”
이기영의 말을 들은 김현성은 파란 눈을 찻잔으로 떨어뜨리며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괜히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아 이기영도 같이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창 밖에 뜬 둥근 달이 잔 안에서 일렁이며 흔들렸다.
“저는 아직 기영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웃어 보이는 얼굴은 서운했으나 대답은 단호했다. 말의 끝머리에 김현성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리다 간절함을 담아내었다.
“아직, 아직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그것을 아는 방법도 가르쳐 드리지 않았습니까.”
3일 동안 이기영 없이도 잘 살았지 않은가. 말하고 보니 이기영은 어느새 김현성에게 해줄만한 건 다 해주었다.
“아직은 사람을 대하는 것도 많이 서툴고…찾아야하는 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제가 방해만 되는 거 아닙니까?”
“무슨…! 아닙니다!”
김현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앉았다. 심장이 떨어질 뻔한 이기영은 혹시 목소리가 떨리진 않는지 한차례 가다듬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무엇을 찾는지 아직도 말씀해주시지 않기에 그런 뜻이라 생각했습니다.”
“오해입니다. 저는 걱정이 되서…제가 찾는 것이 인간에게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
그것은 또 의외의 이유였다. 분명 비밀이라거나, 중요한 보물이라 말하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용이 찾고 있고 인간에게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 확실히 위험하기는 할 것 같았다. 특히 보잘 것 없는 힘을 가진 이기영에게는.
“무엇이기에 그러십니까? 무기입니까?”
“아닙니다. 더 위험한 것입니다.”
“귀신이나 도깨비인지요?”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흉악하고 끔찍한 것입니다.”
모르는 이가 들으면 답을 모르는 수수께끼 같을지 모르나 이기영은 여기까지만 들어도 대충 짐작이 갔다. 칼보다 위험하고 귀신이나 도꺠비보다 흉악하고 끔찍한 재앙. 천재지변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니, 그것을 제외하고 나면 쉽게 꼽을 수 있었다. 특히 이기영은 그것을 아주 잘 알았다. 최근 몇 년 동안 하늘이 늘 그 위험을 경고하며 아우성치는 것을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보고 있으니.
이기영은 삐뚜름한 웃음이 비집고 나오려는 것을 찻물을 한번 들이키는 걸로 삼키며 최대한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역신입니까?”
“…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떨어트리는 김현성과 반대로 이기영은 크게 웃음이라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용이 뭍으로 나와 해야만 하는 일. 찾아야만 하는 것. 이기영은 자신이 이렇게 늦게 알아챘다는 것에 더 놀랐다. 그의 눈을 가리는 게 하늘의 뜻일지도 몰랐다. 김현성과 만나게 되는 것도 전부 다 말이다. 김현성이 그토록 찾고 있는 역신이 바로 이기영이었으니까.
*****
이기영이 김현성의 일을 돕기 시작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햇살이 뜨거워 이기영은 제 집과 관저에서 거의 나오질 않았다. 김현성은 가끔 이기영이 찾아주는 역신과 관련된 서책과 서류를 받아 돌아왔다. 그가 혼자 찾을 때보다는 유용한 자료였다. 옛 역사 기록의 필사본도 있었다. 관의 손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세세한 기록까지 놓치지 않았다. 바다 건너 땅과 대륙에서 일어난 것에 대한 자료까지도 일부 있었다. 정사를 보는 도중에도 어찌 이렇게 세심한 정리를 할 수 있는지 늘 놀라울 정도였다. 김현성은 정사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여전히 회의는 그에게 낯설었다. 회의 내용이 아니라 그들의 이해관계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그랬다. 오늘의 회의 내용은 최근 한 지방에서 수상한 낌새가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오가는 이름이 기억에 있었다. 김현성과 직위가 같기도 했으며, 이기영이 기억해두라고 한 이름이었기에. 그래서 김현성은 드물게 회의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반란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소.”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닌가?”
“이렇게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무슨 소리요.”
한 대신이 사정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흔들며 말했다. 이 태평 성대한 시대에 반란이 웬 말인가. 여전히 인간들의 이해관계를 알 수 없는 김현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김현성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왕과 이기영은 늘 지방 호족들의 정세를 살피고 의견을 나누느라 바빴다. 직접 나서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왕이 백방을 뛰어다니니 반란의 불씨는 타오를 것 같다가도 꺼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다 결국 터지고 말았다. 왕이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에 게으름 피울 수 없는 대신들이 먼저 발견하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그래서 지금 회의의 방향은 누가 반란의 내밀한 조사와 진압에 나설 것 인가였다. 정해지고 나면 왕에게 상소를 올리고 반란지로 향해야 하는 일. 왕의 신임을 얻을 기회이기도 했으나, 파벌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나 일처리가 미흡했을 경우 돌아올 화가 두려워 선뜻 나서겠다는 이는 없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회의를 길게 끌지 않기 위해 김현성이 말했다. 대신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김현성이 덧붙이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란이라는 이례적인 일이 일어난 곳이니 어쩌면 역신에 대한 단서가 있을지도 몰랐다. 혼란이 있는 곳에 기회를 도사리고 있는 것이 역병이 아니던가. 김현성은 얼른 자신에게 주어진 벅찬 임무를 내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계속 짊어지고 있고 싶기도 했다. 내려놓았을 때 잃게 될 것이 두려워서. 그 공허함이 얼마나 클 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상소를 읽은 왕은 모두가 예상한 바와 같이 강경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김현성은 왕이 허락한 많은 군사를 이끌고 반란지로 향했다. 조사를 통해 죄를 밝힐 필요는 없었다. 한때 김현성과 같은 관복을 입던 역적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왕의 군대를 공격했다. 군대의 규모를 보고 항복하길 바랐던 김현성의 헛된 희망은 날아갔다.
전투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김현성이 소극적인 탓도 있겠으나, 역적의 작전이 생각보다 영악하고 교묘했다. 서로의 피해가 크지 않은 소모전이 길게 이어졌다. 돌아가는 일이 점점 미루어져 초조해진 김현성은 마침내 직접 검을 들고 전장에 섰다. 용의 무위에 영악한 작전도, 단단한 성벽도 하룻밤에 무너졌다. 역적과 그 신하들을 옥에 가두고 내막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역병이 돌 낌새는 없었다. 기아도 없었으며, 폭정에 시달린 것 같지도 않았다. 이기영의 보고서에 풍년이 계속 되었다고 쓰여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수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현성은 마지막으로 옥에 갇힌 죄인을 심문했다. 그는 김현성의 생각과는 달리 스스로의 권력에 취해 호기 넘치고 야망이 큰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그 성을 둘러싼 군대 앞에서 수일 밤을 견뎌낼 작전을 생각해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심문 도중에 가담자에 대해 물었으나 그는 하늘이 일러주었다고만 말했다.
김현성은 수도로 돌아왔다. 죄인을 형부에 넘기고 왕에게 보고를 올렸다. 왕은 보고에 만족하고 김현성에게 상이 있을 거라 말했다. 몇몇 시선이 질시와 경계를 던져왔다. 김현성은 그 시선 속에 이기영이 없는 것을 알고 그가 왜 자리에 없는지, 그것만이 궁금할 뿐이었다.
여전히 햇살은 따가웠다. 늘 이기영이 앉아있던 관저에도 이기영은 없었다. 다른 이를 불러 물어보니 이기영이 오늘 입궁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이기영의 사저로 향했다. 궁과 가까운 곳에 있는 그의 집은 이기영이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았기에 김현성도 자주 가본 적이 없었다. 김현성이 그 앞에 도착하자 어느새 해가 졌다. 문을 두드려보았으나 하인의 대답이 없어 그냥 문을 밀고 들어갔다.
판판한 돌이 깔린 넓은 마당에 인적이 없었다. 그 많던 하인들이 다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둠을 밝히는 등불하나 없이 싸늘한 대문 안으로 김현성이 걸어 들어갔다. 마당 건너에 있는 집 안에도 흔한 등불하나 없이 캄캄했다. 어둠 속에서 불안이 속삭이는 것 같아 빨라진 걸음으로 집 안을 돌아 다녔다.
“기영 씨.”
그의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 작게 울리며 돌아왔다.
드디어 안채에서 작은 불빛이 보였다. 김현성은 허겁지겁 그곳으로 걸었다. 툇마루가 불안하게 삐걱거렸다. 부름도 없이 벌컥 문을 연 김현성을 반긴 것은 타들어가는 호롱등불과 빈 방이었다. 혹시, 김현성이 자리를 비운 동안 대륙으로 간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현성 씨.”
환청처럼 김현성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김현성은 몸을 홱 돌렸다. 안채의 앞마당에 이기영이 서 있었다. 늘 보던 관복 차림이 아니었다. 색은 평소 입던 관복과 비슷한 자색에 더 짙고 검은색에 가까웠다. 허리를 조이는 대는 붉은색에 긴 같은 색의 술이 아래로 길게 늘어졌다.
하얀 얼굴에 늘 보던 미소가 걸려있지 않았으나 김현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 가신 줄 알았습니다.”
환한 목소리로 말한 김현성이 신을 신지 않은 발로 흙을 밟으며 다가갔다.
“발이 더러워집니다.”
“괜찮습니다.”
이기영의 말에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발이 젖지 않습니까. 그 목소리에 이끌려 김현성은 그리도 무서워하던 뭍으로 올라왔다.
“기영 씨는 무슨 일로 나와 계십니까? 어디 다녀오던 길이십니까?”
이기영은 대답 없이 미소를 그려냈다. 김현성인 이 미소가 낯익었다. 그가 모르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좀 더 생각해보시지요, 말하던 이기영의 미소였다. 김현성은 답을 알 길이 없어 고개를 숙이며 답을 독촉하는 새까만 눈을 피했다.
“저에게 물어볼게 있지 않으십니까?”
시야 밖에서 불쑥 이기영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와 김현성은 굳어버렸다. 붉은 입술이 너무 가까워서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김현성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허리를 굽히던 이기영도 웃으면서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김현성은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선 이기영을 보기가 두려워 시선을 살짝 비켜 입을 열었다.
“없습니다.”
“정말입니까?”
“네. 날이 더우니 어서…….”
김현성은 말을 잊지 못했다. 코를 들이치는 악취가 너무도 끔찍하여 두 손을 들어 코를 막았다. 숨이 턱 막혀왔다. 이기영의 목소리가 다시 그에게 물었다.
“정말로 없습니까?”
“욱…….”
“제게서 나는 겁니다. 모른 척 하기에 숨기던 걸 풀었는데, 어린 용에게는 좀 과했나봅니다.”
헛구역질을 하느라 김현성이 입을 열지도 못하자 이기영은 다시 주술을 펼쳤다. 그리고 김현성이 외면하던 진실을 하나하나 줄을 세워 들이대었다.
“계속 모른 척 하실 생각이십니까? 반란지에서 들으셨을 겁니다. 하늘이 일러주었다고. 감히 하늘의 뜻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이 이 나라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저 밖에 없다는 걸 아실 텐데. 제가 준 자료는 제대로 읽은 게 맞습니까? 부러 단서를 주었는데 모른 척 하시기에 참 당황했습니다.”
“모릅니다. 저는, 그런 건, 아직…….”
“의심병도 병입니다. 인간이라면 피할 수가 없지요. 퍼트리기도 참 쉽습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
김현성이 이를 꽉 무는 것을 보고도 이기영은 한차례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고 말을 이어갔다.
“제가 바로 역신입니다. 처음 했던 약속을 이리 지키게 되는군요.”
“그만하세요, 제발…….”
김현성이 애원했다. 그는 이기영이 더 이상 말을 잇기를 원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농담이었다 말하기를. 거짓이었다고 말하기를. 그렇게 빌었다. 이기영은 이번에도 김현성의 마음을 배반하고 시원한 얼굴로 웃었다. 이기영은 이미 떠날 준비까지 마친 것이다. 그것이 김현성의 기대를 발로 차 무너뜨리고 희망을 베어 가르는 듯 했다.
“이 땅에 다시는 발붙이지 않겠습니다. 대륙으로든 어디로든 떠나지요. 제가 이래봬도 제 한 몸은 소중해서요. 어리다고 해도 용이 달려든다면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그만, 그만해!”
김현성은 울음이라도 터트릴 기세로 소리치며 부드러운 옷자락을 혹여 놓칠세라 꽉 붙들었다. 놀란 이기영이 한발 물러섰으나 뿌리칠 수 있을 리 없었다. 김현성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고르지 않고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그 정도로 간절했다. 눈물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입을 열었다. 이런 식으로 엉망인 대화는 처음이었다.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저는 당신을 이렇게 보내기 싫습니다, 기영 씨.”
“역시 죽이시겠습니까?”
“죽이지 않습니다! 죽이지 않습니다. 저는, 저는 그저 당신과 함께 있고 싶을 뿐입니다.”
김현성의 말에 구겨진 소맷자락을 불안하게 보고 있던 이기영이 눈을 크게 떴다. 무언가가 이렇게 소중하다는 마음을 가진 것에 김현성도 놀랄 정도였다. 건네진 호의가 쌓여 김현성의 호의가 되기까지 크게 오래 걸리진 않았다. 김현성은 어느새 이기영이 있는 곳을 떠날 수 없어졌다. 그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해서. 짊어지고 있던 것도 다 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어디든 좋습니다.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제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저는 용이니까. 이번엔 제가 당신을 돕겠습니다.”
“그건…….”
이기영의 입이 열렸다. 또 거절의 말이 날아올까 두려워 김현성은 무심코 소맷자락을 꽉 쥐었다. 김현성의 생각과는 반대로 이기영은 곱게 웃었다.
“그건 나쁘지 않네요. 어차피 용에게서 도망갈 재주도 없으니. 저를 죽이지만 않는다면.”
“죽이지 않습니다.”
김현성이 즉답했다. 이기영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핏줄이 서도록 소맷자락을 쥔 김현성의 손목을 손가락으로 감아쥐었다. 칼에 베인 듯 저릿한 아픔이 달렸으나 김현성은 이기영과 마주 웃으며 품 안으로 기대오는 이기영을 안아 들었다. 온 몸의 신기가 더럽다며 아우성쳤으나 김현성은 오직 이기영의 목소리에만 집중했다.
“좋습니다, 그럼 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