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路資 W.B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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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잣돈

1. 먼 길을 오가는 데 드는 돈.

2. 죽은 사람이 저승길에 편히 가라고 상여 등에 꽂아 주는 돈.

 

 

 

 

 

몇 차례의 난으로 빌빌거리던 나라와 난을 피해 도망간 제 가족이 남긴 빈털터리 가문을 살려보겠다고 이기영도 애를 써왔다. 제 목까지 드리워진 칼날에 도망간 가족을 대신해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 이기영은 운 좋게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도, 나아지는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여기가 끝이라는 소리였다. 이기영은 미련 없이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아예 멀리까지 떠나버리는 게 맞다는 판단을 내렸다.

먼 길을 가기 위해 몰락가문에서 긁어모은 비녀와 서책 따위를 팔았건만 돈이 한참 모자랐다. 중간에 상인이 돈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실랑이를 벌였지만, 상인은 이기영에게 정당한 값을 끝까지 지불하지 않았다. 이전이라면 다소 귀찮아지더라도 제 이익을 챙겼을 이기영이었으나 지금 일이 크게 벌어지면 곤란해진다.

결국 가지고 있는 돈만으로 뭐라도 해서 불려야 판이었다. 이기영이 짜증스럽게 장터에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이전 물건에 값을 매길 때 보았던 사내였다.

노잣돈을 마련한다고 했었다. 두 눈을 붉게 물든 사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었다. 마찬가지로 노잣돈을 마련해야 하는 이기영은 그를 보았었다.

이기영이 그를 보았듯이, 그도 이기영을 보았던 모양이었다. 사내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쓰십시오. 가시려는 길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지만, 조금은 보탬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사내는 그날,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이기영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딘가 익숙했다. 익숙한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가 왜 새하얀 옷자락을 걸치고 있었는지, 용한 눈치로 알아낼 수 있었다.

여전히 붉은 눈가를 달고 있는 사내에게 이기영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노잣돈이 든 주머니를 밀어냈다.

이기영은 아주 먼 길을 가기 위해 노잣돈을 마련했고 사내는,

 

“고인의 것을 탐내야 할 정도로 급하지는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가는 길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노잣돈이렷다. 이기영은 그의 마음을 거절했다. 좋게는 떠나간 이를 위한 마음이었고, 나쁘게는 재수나 옴 같은 삿된 것이 붙을 게 두려워서였다. 어느 누가 망자에게 들어갈 돈을 탐내겠는가. 가뜩이나 갈 길이 먼 이기영으로서는 더욱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사내는 이기영의 말에 입을 뻐금거렸다. 소리도 못 내고 입을 열었다가 다무는 것을 반복하다가 이윽고 쓰게 웃어 보였다.

 

“쓰임을 잃은 것이니 받으셔도 괜찮습니다.”

 

“쓰임을 잃었다 하여 그것을 모은 귀하의 마음마저 잃게 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 마음과 함께 고이 간직하소서. 나지막한 말을 끝으로 이기영은 자리를 뜨고자 했다. 그때 사내가 평온하게 들릴 정도로 잔잔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의 존함을 물어도…….”

 

답을 해줄 이유는 없었다. 이기영에 대해 하는 이들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을 터라 입을 다무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자신에게 거절당한 사내가 신경 쓰였고, 그 이전에 헤어짐으로 난도질당했을 사내의 마음이 걸렸다.

그래서 이기영은 입을 작게 열어 그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기영이라고 합니다.”

 

사내는 이기영의 대답에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이기영만큼이나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성이라고 합니다.”

 

 

*

 

이기영이 아는 한에서 가장 빠르게 돈을 불리는 방법은 노름판이었다. 그 역시 그리 좋아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내기와 노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성공한다면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알기에 이기영은 심통을 부리면서도 노름판에 자리를 잡았다.

노름판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큰 것이 아니었다. 단지 확실하게 이기는 게 아니라면, 조금의 도박도 하지 않는 성격이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노름판에 끼어든 이상, 이기영은 이기는 것이 불확실한 상황을 그대로 둘 생각은 없었다.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함께 노름을 즐기는 이들을 제 편으로 만드는 거였다. 그리하여 이기영에게 속는 자는 노름판의 주인뿐이었다.

여러 그림과 문자가 자리한 조각들이 이리저리 오갔다. 누군가가 손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일정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또 다른 누군가가 헛기침을 내고, 턱을 괴고 고민하는 이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돌아다녔다. 괜한 잡담도 오갔다. 그 가운데에서 이기영만이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다.

노름판이 끝났을 때, 이기영은 목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가 끌어들인 이들에게 약속했던 보상을 지불하고 나니 조금만 더 모으면 될 일이었다.

날이 저물어 어둑해졌다. 그림자 길어진 길을 걷자 태사혜 바닥 아래에서 돌처럼 뭉쳐진 흙이 바스러졌다. 어느새 머리 위에 떠 오른 달빛 밑에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기영은 말없이 서 있다가 다시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흙모래를 밟는 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당황하는 티도 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제 뒤를 밟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처럼 천천히 걸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이기영이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아는 것이 많아도 모르는 척, 신숭생숭하니 어수선하고 어리숙해 보이게 굴기. 그렇게 얕잡아보다가 정신 차리면 상대는 나락을 뒹굴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길은 어둡고 복잡했다. 상대는 이기영을 쫓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으니 걷는 척 탁류의 사이로 밀어 넣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기영은 무뢰배들에게 잡힌 사람을 보았다. 그가 사람들을 떨치고 이기영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가 달려 나와 그자를 잡았다. 서로서로 언성을 높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싸우지 않으려는 사람들 몇몇이 말리는 모습도 보였다. 멀찍이 떨어져 보니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중요하지 않으니 이기영은 관심을 끊기로 했다.

거칠게 몸을 밀고 치며 점점 커지는 다툼을 멀리서 흘깃 보고는 자리를 옮겼다.

쫓아온 이유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노름판에서 그렇게 벌어들였으니 쫓아서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돈을 뺏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간이 아깝지만, 며칠간 잠적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라. 이기영은 한동안 노름판에 나가지 않고 가더라도 전혀 다른 곳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모르니 한참을 돌고 돌아 집으로 향했다. 일하던 이들은 전부 내보내서 찬바람만 드는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이기영은 익숙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무얼 하십니까.”

 

물으니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리는 김현성의 모습이 보였다. 물이라도 머금은 솜이불처럼 축 처진 모양새였다. 김현성은 입술만 달싹이며 우물거렸다.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다시금 질문하니 웅얼거리며 신뢰감 없는 목소리로 물어물어 찾아왔노라, 답이 돌아온다.

그가 거짓을 말하든, 진실을 말하든 이기영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다지도 걸음을 옮길 수 없는, 눈을 뗄 수 없는 알 수 없을 노릇이었다.

 

“밤바람이 찹니다.”

 

타인에게 끼어들면 성가심과 후회 뿐이기에 이기영이 언제나 지양하던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기영은 걸음을 떼어 아무도 없는 집의 나무문을 열었다.

 

“밖보다는 안이 낫겠지요.”

 

들어오세요. 이기영의 허락에 김현성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이기영을 따랐다. 술 냄새 하나 풍기지 않았지만, 만취한 사람처럼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 술이 아니라 슬픔에 취하였구나.

이기영은 김현성의 앞에 상을 펴고, 자잘한 먹을 것을 챙겨왔다. 술과 잔도 챙겨 느지막한 술자리를 만들었다.

혹은 아픔에 취했거나. 촛불 속에서 드러나는 김현성의 얼굴에 생채기가 나 있어서 이기영은 말없이 약상자를 꺼내왔다.

연고를 건네며 물으니 길가에서 시비가 걸렸다고 한다. 이기영이 건넨 약을 얼굴에 바르면서 김현성은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알아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을 보고 이기영은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쓸데없이 나서지 말라는 타박도, 나서서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에 감사도 전하지 않았다. 단지 미련스러운 이를 보다가 물었다.

 

“이겼습니까?”

 

“이겼지요.”

 

그럼 되었습니다. 이기영은 김현성이 작게 낸 웃음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기영이 술을 따라 건넨 것을 거부하지 않고 연신 들이키던 김현성은 촛농이 오래된 촛대를 타고 흘러내릴 때 겨우 입을 뗐다.

 

“모두가 떠났습니다.”

 

이기영은 김현성의 목소리를 안주 삼아 술을 홀짝였다.

난으로 가족이 도망가고, 친구를 잃었다는 김현성의 이야기는 그리 색다를 게 없었다. 당장 이기영만 해도 가족들이 도망쳤으니.

그런가요, 낮게 답하는 이기영에게 별안간 김현성이 웃어 보였다.

 

“도망갔으면, 잘 살던가…….”

 

목이 베였답니다. 잡혀서 목이 베였답니다. 쓰게 죽음을 말한다. 눈을 감고 괴롭게 말하는 김현성을 이기영은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단지 도주를 한다고 해서 목이 베이진 않는다. 실제로 제 가족들은 멀쩡히 도망갔으니 말이다. 뜻하는 바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나라의 칼이로구나.

김현성의 집안은 무인 집안으로 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고 도망가 적국에 붙으려 했을 것이다. 탈신도주한 무인을 본보기로 처형했을 것이다.

이기영은 안타까운 듯, 제 마음이 다 아프다는 듯 쓴 탄설음을 내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나라의 역적이나 다름없는 존재를 집안으로 모신 제 안일함을 탓하며 술잔을 매만졌다. 이래서 나서지 말고 조심히 살아야 한다는 건데, 답지 않게 감성을 부렸다가 사달이 난 듯하다.

술잔이 빈 줄 알고 술병을 들어 올린 김현성에게 이기영은 매만지던 술잔을 내밀었다. 음, 더 큰 문제는 실제로 후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면 이기영은 저잣거리에서 김현성을 만나 그가 내미는 노잣돈을 거절했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새하얀 도포를 입고 노잣돈을 마련하던 김현성은 그것을 이기영에게 건네고자 했다. 쓰임을 잃었으니 대신 써달라고 말이다.

김현성의 제안을 거절한 그 날,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죽은 이를 달래기 위한 장례를 치르기 위한 돈이 쓰일 수 없다는 것은, 그 장례가 치러지지 못한다는 소리였으니.

알면서도 불러들이는 것이 사람의 미련이고 욕심이니, 이기영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김현성이 채운 술을 머금었다. 나라를 뒤로 한 채 도망가 조심히, 조용히, 안전히 살아야 하는 이기영에게 역적의 집안에서 유일한 생존자는 위험했다.

쓸 곳이 없는 돈은 집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다고 말하는 김현성이 무척이나 슬퍼 보였다. 실제로도 그는 슬픔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빠져들어 허우적거리다가 그래도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대는…….”

 

김현성이 잠시 입을 열었다가 단어를 굴리듯 입을 다물고 우물거렸다. 무언가 찾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윽고 술에 달아오르는 뺨을 드러내며 천천히 맞붙은 입술을 떼어냈다.

 

“기영씨는, 어찌하여 이곳에 홀로 계십니까.”

 

곧장 호칭 하나 바꾸는 것에 스스로 뿌듯해하고 대견스러워하는 모습이 어린 꼬마처럼 보였다. 잠시나마 다른 곳으로 의식을 돌린 김현성은 그림자처럼 달라붙는 아픔을 떼어내려고 애를 썼다.

이기영은 웃음기를 작게 털어내고 대답을 해주었다.

 

“제 가족도 도망갔답니다. 저는 집안을 어떻게든 살려내 보려고 남았는데, 그조차도 어렵더군요.”

 

해서 나라를 버리고 떠나는 이처럼 떠나고자 했다는 말은 삼켰다. 몰락한 가문을 억지로 붙들고 받은 것도 없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칠 생각은 없다는 말도 삼켰다. 그저 이기영은 우리는 참 몹쓸 가족을 만났습니다, 라고 말했다. 김현성은 눈을 크게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피붙이라고, 보고 싶어서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그래서 노잣돈을 마련하고 있었다고, 이기영이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들은 김현성은 무언가 얻어맞은 사람처럼 움츠러들었다. 이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이기영을 바라보았다.

 

“저는, 저는…….”

 

어째서 제 가족들이, 피붙이들이 보고 싶지 않을까요.

 

“글쎄요…….”

 

답을 구하는 김현성에게 이기영은 한숨처럼 답했다. 일렁이는 촛불 빛을 받아 죄책감 어린 김현성의 눈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죽은 가족이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이 못되어 먹은 자신을 나타내기에 김현성은 수치에 잠식되어가는 듯했다. 가족을 향한 정보다 미움이 더 큰 것이 부끄러웠다. 김현성은 고개를 숙이고 비어버린 술잔으로 도망쳤다.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드물죠?”

 

이기영이 별안간 뱉은 말에 김현성의 시선이 이기영의 손가락 끝부터 서서히 올라 이기영의 눈에 닿았다. 까만 눈은 무미건조할 뿐, 어떠한 동정도 경멸도 보이지 않았다. 아득할 정도로 까맣기에 보이지 않는 건가 싶을 정도로 감정이 엿보이지 않았다.

 

“저는, 제 가족이 도망간 것에 별다른 생각이 없답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고, 각자만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영의 집안 특성을 고려하면 그리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도망간 가족에게 신경을 두지 않고 가문만 돌보았다. 이기영은 제 가족에게 원망도, 슬픔도, 미련도 갖고 있지 않았으니 상처받을 작으나 마한 명분조차 없었다.

반면 김현성은 척 보기에도 이기영과 달랐다. 평범하게 제 가족을 아꼈겠지. 남들과 다름없이 제 가족을 사랑했겠지. 그래서 버려진 고통이 쓴 거겠지. 지들끼리 도망쳐 지들끼리 죽어나자빠진 이들이 보고 싶지도 않을 만큼 상처받은 것이겠지.

 

“그러니, 그들은 제게 상처 하나 주지 못했지요. 현성씨는 아닌듯하지만요.”

 

“보고 싶다고……,”

 

“보고는 싶지요. 어디 얼마나 잘 사나 궁금하기도 하고.”

 

잘살면 잘사는 대로 좋았고, 못살면 못사는 대로 좋았다. 잘살면 잘산다고 놀렸을 것이고 못살면 못산다고 놀렸을 것이다. 이기영이 작게 웃음 지으니 김현성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족 간의 관계가 다르니 현성씨와 저의 반응이 같을 필요는 없답니다.”

 

이기영의 짓궂은 마음이 정당한 만큼, 김현성의 미움도 정당하다. 자신이 가지는 감정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저처럼 보고 싶은가 하면, 현성씨처럼 떠나간 이를 원망할 수도 있죠.”

 

이기영이 말을 마치고 어느새 비어버린 제 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불거진 두 눈으로 이기영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김현성에게 잔을 뻗었다.

 

“따라주시겠습니까.”

 

김현성은 목울대를 크게 움직이고는 조용히 술병을 들어 올렸다.

 

 

*

 

노름판에서 가볍게 한탕하고 나오니 꽤 많은 돈이 모였다. 혼자는 물론이거니와 사치를 부리지 않는다면 둘, 셋도 책임질 양이었다. 이기영은 만족스러운 눈으로 목돈을 챙겨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돌아가 남은 물건들을 챙겨 빠른 시일 내로 도망가면 될 일이다.

말을 타고 땅을 건널까, 배를 타고 물을 건널까. 동생이 어디로 향했더라. 유달리 저와 비슷한 성격에, 혹은 그 이상인 동생과 잘 맞았다. 다른 가족은 보지 않더라도 동생은 만나고 싶었다. 배를 타고 섬으로 갔던가.

곰곰이 생각하던 이기영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미리 이야기해둔 상대에게 번 돈의 일부를 지불했다. 기다려 달라는 부탁에 멀거니 하늘만 보며 시간을 때웠다. 다시 돌아온 상대에게서 일이 모두 끝났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이기영은 그에게 꽃 하나를 건넸다. 대신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챙겨 가기로 한 물건들은 이미 정해두었으니 보자기로 싸는 것은 금방이었다. 시조를 읊거나 그림을 그리는 취미조차 없었으니 이기영에게 먹도구는 챙길 필요도 없었다. 아, 그래도 이건 좀 값이 나가보이네. 언제 돈이 떨어질지 모르니 예정에 없던 물건도 더 챙겼다.

어둑한 밤이 되어 잠들 때, 이기영은 계속해서 고민했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수마처럼 머릿속에 기어들어왔다. 위험은 별로인데. 도박은 별로인데. 확실한 승산이 아니면 하지 않는데. 그렇게 이기영은 뒤척거리며 밤새 고민만 했다.

겨우 잠들고 일어난 탓에 졸린 이기영은 찾아온 이에게 환대도 못 해주었다.

얼마나 뛰어온 것인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는 김현성을 보고 이기영이 자신이 앉은 마루 옆을 두들겼다. 꾸벅거리는 고개를 가다듬고 잠에서 깨어나려고 몇 차례 손 세수를 한 이기영이 여전히 제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김현성과 눈을 마주했다.

 

“왜,”

 

왜 그러셨나요? 어떻게, 김현성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죠.”

 

역적이나 다름없는 자들의 장례도 치러줄 수 있을 정도로.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죠. 이기영이 여상히 답했다. 옆에 둔 물 한 모금을 마시는 동안 김현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왜…….”

 

말을 끝맺지 못하고 김현성이 입을 다물었다. 입을 열면 금방이라도 말로 구성되지 못한 감정들이 쏟아질 듯했다. 그런 김현성에게 이기영은 글쎄요, 하고 운을 뗐다. 얼마 전 밤에 술잔을 기울이며 나눴던 대화 속에서 그러하듯 이기영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현성씨는 왜 저를 도와주셨나요?”

 

이기영의 물음에 김현성은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적 없습니다.”

 

도와준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치고는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애써 침착해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소용없다는 것이 웃음을 나오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기영은 답지 않게 유쾌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끅끅거리며 입을 막고 웃음을 참으려 하는 이기영의 모습에 김현성은 당황하며 뻐금뻐금 입을 열었다.

 

“왜, 웃으시는…….”

 

불확실한 말투를 들으며 이기영은 생각했다.

왜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서, 김현성은 이기영에게 다가와 돈을 건넸을까. 왜 누군가에게 쫓기는 이기영을 보고 따라와 그를 대신해 다툼에 휘말렸을까. 왜 이기영의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왜 새하얀 도포를 입은 그가 익숙했을까.

 

“가족이 도망을 쳤을 때, 집으로 관리들이 찾아왔었지요.”

 

겁을 준답시고 목 끝까지 들이 밀어진 칼날을 든 관리들 앞에 이기영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관리들은 가족의 도주를 이기영에게 따졌다.

 

“가족을 대신해 책임을 지겠다던 제 말을 듣고 누군가 말했죠.”

 

책임을 지겠다니, 기회를 줍시다. 이기영이 머릿속에서 겹쳐지는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숙인 고개를 들어 뒤늦게 온 사람을 올려다본 그때처럼.

 

“그때도 당신은 새하얀 도포를 입고 있었죠.”

 

김현성이 입을 다물고 이기영을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피했다. 이윽고 쓰게 웃으며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책임을 지겠다는 말씀을 하셨잖습니까.”

 

저도 곧잘 하는 소리라서……, 자꾸 눈에 밟히더라고요. 그렇게 말한 김현성은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이기영과 김현성은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었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서로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입버릇처럼 말했던 책임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기영은 책임을 지겠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잡혀가 제 가족의 죄를 대신 짊어졌을 것이고, 김현성은 태생부터가 책임을 져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다. 짐을 덜어줘야 할 가족이 오히려 무게를 더했다.

이기영은 손가락을 까닥이며 김현성을 가까이 불렀다. 그 손짓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온 김현성의 도포를 그러쥐었다. 여전한 하얀 색을 손으로 쓸며 말했다.

 

“백색 말고도 다른 색도 어울릴 거 같아요. 청색이나, 자주색.”

 

청자색도 괜찮을 거 같네요. 이기영의 말에 김현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영이 물끄러미 김현성을 올려다보다가 불현듯 말을 건넸다.

 

“저랑 떠나실래요?”

 

계속해서 생각해왔다. 이기영 혼자 도망치면 쫓겨도 얼마 안 가 추적이 끊길 것이고, 잡혀도 목이 날아갈 정도로 커다란 문제를 겪진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윽박지르고 몇 날 며칠 감옥에 있는 정도일 터. 그러나 김현성과 함께 떠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김현성의 가족이 끝내 붙잡혀 그 대가를 치른 것처럼, 이기영은 김현성과 도망치는 것으로 그리될 가능성이 있었다.

도박을 싫어하는 이기영은 그런 손실이 생길 우려를 감당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타인의 삶에 끼어드는 것은 결국 성가심과 후회만 남길 뿐이라고 누누이 생각해왔다. 그럼에도 이기영은 김현성의 손을 붙잡아 당기며 말했다.

타인의 삶에 먼저 끼어든 것은 이기영, 자신이 아니라 김현성이었다.

 

“저랑 떠나시죠.”

 

김현성은 자신을 붙잡은 이기영의 손을 바라보았다. 떼야 하는데 떼어내고 싶지 않아서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기만 했다.

 

“……저와 함께 가시면 위험해지실 겁니다.”

 

“제 머리가 좋아, 현성씨 데리고 충분히 달아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러니 우리도 책임이고 뭐고, 그냥 달아나 봐요.”

 

제가 모은 돈과 이제 정말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현성씨의 돈을 합치면 괜찮은 여정을 보낼 수 있을 겁니다. 김현성은 이기영을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 책임. 김현성 인생에서 떨어지지도 않은, 귀에 딱지가 얹을 정도로 들어본 말이었고, 오랫동안 숨소리처럼 내뱉던 말이었다. 입안에서 한참 굴려보다가 간신히 삼켜내며 김현성은 이기영의 손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작지만 확실하게 느껴지는 편안한 웃음을 보였다.

 

 

*

 

쾅쾅, 거칠게 문을 치는 소리에 이른 아침부터 눈을 뜬 이율하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욕을 그대로 쏟아붓기 위해 문을 열어젖혔다.

 

“뭐야. 오라버니, 살아 계셨소?”

 

그러나 문을 열어 문 두들긴 상대를 보니 욕 대신 장난스러운 질문이 입 밖으로 나왔다.

 

“말투 왜 그래.”

 

징그럽게. 오랜만에 만난 손위 형제가 진절머리를 냈다. 찾아온 객은 제 오라비인 이기영이었다. 다 버리고 떠난 집에 홀로 남은 이기영 말이다.

버려야 할 때 손 털고 일어서는 법을 모르던 이기영을 비웃고 떠난 게 엊그제 같았다. 그래도 반가운 얼굴에 비뚜름하게 웃어 보이며 이율하가 말했다.

 

“집은 어쩌고?”

 

“팔아먹었지.”

 

쓸모도 없는데 내가 왜 계속 붙들고 있냐. 이기영이 제 동생을 밀어내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어딜 기어들어 와.”

 

“오랜만에 만났는데 박대할 거냐.”

 

독하게 쏘아붙이면서도 이율하는 이기영을 내쫓지 않았다. 대신 이기영의 뒤에 서 있던 사내에게 손가락질했다.

 

“이 잘생긴 양반은 또 뭐야.”

 

“네 형부……, 새언니?”

 

뭐? 이율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기영과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줏빛 두루마기를 입은 사내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이율하에게 고개 숙여 보였다.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자기 이름을 밝히고는 기영씨, 하며 이기영을 쫓아간다. 이율하는 저를 두고 이미 들어가 버린 둘의 뒷모습을 보다가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떡 벌렸다. 들을 설명이 많을 거 같아 이율하는 일단 제 집안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야! 이기영! 당장 설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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